Ⅳ. 궁예의 황후 강씨 척살은 진실인가
1. 시작하는 말
궁예가 사상 최악 인성 파탄 군주로 낙인찍히게 된 사건은 부인 강씨를 무자비하게 죽인 일이다. 부인을 척살한 사실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는 ‘벌겋게 달군 무쇠방망이로 부인 강씨를 음부를 쳐서죽이고 두 아들까지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 기록인 『고려사』에서는 쇠방망이가 더욱 커져서 3척 쇠방망이로 둔갑해서 이것을 불에 달궈 죽였다고 기록 하면서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났다.’라는 구절이 추가 되어 있다. 따라서 궁예가 폭군으로 몰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 황후 강씨를 잔혹하게 죽인 일이다.
일반 대중은 왕이 왕비를 죽인 일이 용서 받지 못하는 패륜으로 판단하지만 실제 우리 역사에서는 더 비참한 일이 많았다. 언제나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역사에는 친족 살인의 예는 다음과 같이 있다.
* 고려의 왕자인 혜종과 정종, 광종 사이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중 왕규의 난을 왕식렴이 저지 하면서 왕규 부하 300명이 처형 됨
* 조선 이방원의 형제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이 살해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간이 유배 됨
* 광해군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복형 임해군, 조카인 능창군, 이복동생 영창군을 유배 보내서 사실상 목숨을 빼앗음
이런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천상천하 유일한 자리인 왕권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서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역사에 비추어 보면 궁예가 부인 강씨를 죽인 것이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지탄을 받을 사항은 아니다. 그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여성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위를 쇠꼬챙이에 찔려 죽이는 행동이다. 자신의 두 아들을 낳은 정실 황후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능욕스럽게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이 기록에 신빙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 같은 핏줄 형제를 칼로 난도질해서 죽인 행위와 궁예의 행동과 어떤 것이 더 패륜일까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분명한 해답이 있을 것이다. 언듯 보기에는 성격이 괴팍한 궁예가 관심법이라는 의심병이 도져서 벌어진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궁예가 부인 강씨를 처단한 이면에는 피치 못할 특별한 배경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인 강씨를 죽여야 할 정도로 급박했던 상황이 무엇이고 감추어진 진실이 무엇인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2. 내재 된 신라계와 고구려계의 갈등 봉합 정책
당시 상황은 후삼국이 재현되는 시기였다. 885~488년 상주군(沙弗城)에서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장군이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889년 신라가 전국에 공부(貢賦)를 독촉하자 많은 세력들이 거부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옛고구려 땅에서도 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런 미묘한 시기에 궁예가 옛 고구려 땅에 터를 잡았다는 점이다. 궁예가 고구려계 인물이었다면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지만 신라 왕자라는 사실에서 환영을 받을 수 없었고 토착 세력과 갈등은 내재 되어 있었다.
궁예의 입장을 보면 강원도 동쪽을 정벌하면서 이끌고 온 3,500명의 병사들이 전부인데 이 정도 인력으로 통치 기반을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가가 필요한데 전쟁을 통해서 경험을 얻은 군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분야였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 세력과 연계가 필요한데 궁예도 이것에 적극적이었다는 근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 이름을 궁예(활 弓, 후예 裔)라고 지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을 풀이 해보면 활을 잘 쏘는 민족의 후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주몽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줌으로서 옛 고구려 세력을 끌어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계의 정신적 지주인 주몽을 언급함으로서 궁예 자신이 구심점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추측 된다.